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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암신학칼럼-김경재⑤ /2월] 대선정국에서 새롭게 읽는 슐라이에르마허

글쓴이 : 연구소 날짜 : 2022-02-28 (월) 08:32 조회 : 322

김경재의 혜암칼럼 ⑤ / 2022년 2월   
대선정국에서 새롭게 읽는 슐라이에르마허
 
김경재 박사(한신대학교 명예교수, 혜암신학연구소 편집고문)


1.  
 왜 슐라이에르마허를 다시 읽는가?

 

신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목회자나 신학도는, 19세기에 헤겔과 동시대를 살았던 위대한 독창적 대학자요 목회자 슐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 1768-1834)현대신학의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말을 한 번쯤은 듣게 된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 교계에서나 신학계에서 그는 엄청나게 오해되어 있고 무시당하고, 비판받기를 범신론자, 인본주의 신학자,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매도당하기 일쑤다. 제법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신학교를 다녔던 이 컬럼을 쓰고 있는 필자도, 학창 시절에 슈라에에르마허에 관한 단편적 평가는 매우 부정적인 소개를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필자의 나이 80세를 넘어서 이제 뒤돌아보니 대학자인 슐라이에에르마허를 그렇게 잘못 알고 비난하는 것은 한국 기독교의 수치요 한 인격자에 대한 범죄적 살인 행위와 다름없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그의 가장 널리 알려진 유명한 명저는 종교론: 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에게 주는 강화이다. 그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독일 할레대학교에서 신학, 철학, 고전학을 공부했다. 그는 슐레겔, 노발리스등과 함께 19세기 낭만주의 운동의 중요 인물이었고, 저명한 훔볼트와 더불어 베를린대학교를 설립했으며, 고전문헌학자로서 플라톤전집을 독일어로 번역한 학자였고, 보편적 해석한 이론을 정립한 위대한 인문학자, 문화철학자였다.


정보화 문명과 생물학적 유전자 인간학이 사회분위기를 지배하며, 굳어진 교리주의 기독교와 기업화된 대형교회가 판을 친 결과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라는 자조 섞인 말이 생소하지 않을 만큼 종교생활, 신앙생활이 부끄러운 일이요 멸시당하는 일이 되어버린 오늘날 시대 상황이기 때문에 슐라에에르마허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구태여 슐라에에르마허를 다시 불러내고 그의 종교이해를 바르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필자의 참뜻은 다른 데 있지 않다. 그가 저항하고 극복하고자 했던 의도를 고귀하게 생각하고, 그 높은 뜻을 다시 살려내야 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슐라이에르마허가 저항하고 극복하고자 했던 것은 다음 몇 가지였다. 첫째,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사조 이후로, 스스로 성인이 되었다고 자부하는 현대인들이 이성의 합리적 비판기능을 과신하여 종교, 신앙, 인간의 영성, 무한자 하나님 체험 등을 은근히 시대에 뒤떨어진 덜 계몽된 인간들의 개인 관심 일거리 정도라고 생각하는 오만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의 명저 종교론의 부제(副題)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에게 주는 강화라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21세기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둘째, 슐라이에르마허가 저항하고 비판하고자 했던 대상은 무신론적이고 반종교적인 당시 지식인들의 종교에 대한 오해를 비판한 것 못지않게, 당시 기독교계를 이끈다고 자부하는 성직자들, 신학자들, 교회주의자들이 종교와 신앙의 본질을 오해하고 잘못하기 때문이었다. 인간 영혼의 깊은 영성 안에서 하나님 무한자를 직관하고 느끼며 인간의 삶을 숭고하도록 고양시키는 생동하는 신앙이 아니라, 기존의 정통 교리신학과 세속적 교회 세력을 과신하는 경직되고 속물화된 전문종교인들을 비판하고 극복하려는 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가 저항하고 극복하고자 했던 셋째 과제는 종교의 본질을 철학적 형이상학의 일종으로서 여긴다든지, 종교 본질과 교회의 사명을 도덕적 복지사업 수행이나 개인 윤리적 선한 일을 고양시키는 일에 있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비판한다. 종교와 신앙의 본질은 형이상학이나 도덕철학 정립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계몽주의 청학의 완성자라고 칭송받는 임마누엘 칸트 영향을 받았지만, 칸트를 과감하게 넘어서고 극복하려는 것이다.


칸트철학은 쉽게 말해서 무한자와 유한자, 창조주와 피조물, 영원과 시간, 계시와 이성, 등등 그 이항대립적(二項對立的) 어휘나 개념을 뭐라고 표현하든지 그 양자간의 대립과 철저한 분리를 강조한다. 인간의 이성, 인간성, 유한성은 계시, 신성, 무한성을 포용할 수도 없고 인식론적으로 이해할 수도 없다는 주장이다. 그것이 칸트의 명저 순수이성비판에서 말하려는 핵심이다. 그러나, 슐라이에르마허는 그 양자를 혼동하거나 똑같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의 질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양자관계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로서 다시 연결시키고, 관련시키고, 상호내주(內住)하는 관계로서 재정립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폴 틸리히는 그의 기독교 사상사의 슐라에에르마허를 강의하는 제목에 이름 붙이기를 고전적인 신학적 종합’(The classical Theological synthesis)이라고 말한 것이다.

 

종교의 본질 규정인 절대의존의 감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

 

이제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강화의 핵심을 바르게 이해하여 보기로 한다. 한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최신한 박사의 노고에 힘입어 한국 학계에서도 슐라이에르마허의 고전적인 명저들 중 두 가지 고전 종교론기독교 신앙의 우리말 번역본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송기득 교수의 노고에 힘입어 폴 틸리히의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사상사를 오래전에 접하게 되었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영성과 사상적 배경에서 꼭 기억해야 할 점은 그가 당시 유럽 사회에서 헤겔에 못지 않는 대학자로서 지성인 이었지만, 그의 내면에는 그가 모라비안 교파의 경건주의 영향과 교회사 안에 면면히 흐르는 신비주의 전통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신비주의라 함은 한국에서는 초자연적인 기사·이적 행위를 경험하고 추구하는 별난 경향성인 줄 잘못 알고 있다. 그러나, 신비주의 정신의 핵심은 요한복음서가 강조하는 바처럼 하나님의 영이 직접 인간의 심령 안에 내주(內住)하실 수 있다는 은혜 체험을 말한다. 신과 인간 피조물은 같은 동일한 실재는 아니지만, 그 양자 사이엔 상호내재성 원리’(相互內在性原理) 안에서 하나 됨의 놀라운 은총 체험이 가능하다는 주장이요 체험이다. 그 경험을 할 때 인간존재는 새로움, 기쁨, 자유, 충만, 창조성, 사랑의 존재 능력으로 가득참을 경험한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강조하기를 종교란 하나님 곧 무한하신 영원자를 인간 심령 안에서 경험하는 경건한 직관이며 느낌이 핵심이다 라고 말한다. 종교는 우주에 대한 직관적 감정이다. “종교란 절대 의존의 감정이다라고 표현했을 때, 감정(感情)은 인간이 주체가 된 심리학적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무한자, 영원자,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의 능력과 충만 속에 감싸이고 포용당해 있다는 수동적 정감(情感)이다. 그러므로 종교란 가르치거나 설명하거나 강제로 주입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체험되고 느끼고 고백되어야 하는 성격의 그 무엇이다.


폴 틸리히는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이해를 지지하면서 자기 자신의 독특한 신학적 용어로 표현했는데 곧 종교(신앙, 경건)궁극적 실재에 붙잡힌 상태이며,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라는 것이다. 종교를 인간들이 이해타산을 위해서 추구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천박한 종교이해이다. 종교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는 인간의 욕망 충족을 위해서 초자연적 신적 존재 힘을 빌려서 자기소원을 성취하려는 모든 속물적 종교관을 철저히 배격한다. 뿐만 아니라 종교의 본질을 특정 종교의 교리나 상징체계와 동일시하는 견해도 배격한다. 그것들은 2차적인 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인간의 하나님과의 직접 만남 사건에서 체험의 중간자리에 거간꾼처럼 서서 권위를 부리고 실속 차리는 타락한 성직질서, 교권제도, 경전문자 절대주의 등을 비판하고 저항했다.


슐라이에르마허가 종교(신앙)의 본질을 우주와 신적 영원자에 대한 직관이며 절대의존이 감정이다라고 말할 때, 그는 인간존재 그 자체가 단순히 생물학적 동물이거나 복잡한 유기체적 기계가 아니라 본질상 영성적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며 누구나 인간은 그 무한자 곧 하나님을 자기 자신의 심령 안에서 느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성경 증언에 의하면 인간은 그 본질이 흙이고 유한자이며 진화한 동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단순히 그런 것만이 아닌 것은 무한자 하나님이 인간성 안에 내재하시며, 인간성을 신성에로 승화시켜가기(divination)를 쉬지 않으신다고 본다.


인간성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말은 인간의 생물학적 외모나 인간이 지닌 호모사피엔스로서의 특별한 기능과 재능 때문이 아니다. 인간성의 비밀은 그의 영성 곧 하나님을 닮고,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과 동역할 수 있는 은총 입은 피조물이며 대상자라는 점에 있다. 그리고 그 영성의 핵심은 사랑이라고 증언하는 종교가 기독교이다. 그 사실과 현실을 몸을 통하여 삶으로 알려주신 이가 그리스도이신 예수라고 기독교는 증언하고 고백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예수는 모든 인간들의 원형(原型, archetype)이시다라고 그리스도인들은 고백한다.


대선정국에서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론을 생각하는 이유

 

필자의 이번 칼럼이 202239일에 실시되는 한국의 대통령 선거 이전 혹은 이후, 어느 시점에 활자로 소개될런지 필자는 모른다. 그러나, 이번 필자의 칼럼의 주제를 슐라이에르마허로 삼은 이유는, 단지 신학적 지식습득 목적으로서 독자들에게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들의 삶, 한국인의 삶이 오늘날 너무나 인간성 본질에서 벗어나 있고, 너무나 속물적이고 타락한 정치논리에 병들어 있음이 가슴 아프기 때문이다.


그것을 바로잡고 치유해야할 종교마저도, 특히 한국의 제도적 기독교 교회들의 존재 방식이 신앙 본질과는 거리가 먼 한갖 종교단체로 전락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 나선 몇몇 후보자 인물의 정신적 내면세계를 들여다볼 때, 저급한 주술종교 아니면 인간 욕망 충족 수단으로서 전락해 버린 상술종교에 깊이 관계하면서 그러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슐라이에르마허를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글을 쓰고 보니, 신학자의 글은 재미가 없고 생기도 없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신앙론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영화 이야기 한 토막과 종교시 한 편을 소개함으로써 칼럼을 마무리하고 싶다. 널리 알려진 명작명화 쇼생크탈출에 나오는 약 1분 길이의 한 장면을 잊을 수 없다. 그것은 감옥이라는 평생 수감생활에 익숙해져서, 인간성의 존엄, 아름다움, 자유, 기쁨, 사랑, 희망 따위는 잊어버린 미국 어느 감옥 담장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어느 날 모차르트 음악이 스피커를 통해 감옥 전체 공간에로 들려온다. 살아남기 위해서 동물처럼 감옥생활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살아있는 영혼인 듀프레인이 쇼생크 허름한 도서실 작업장에서, 안으로 문을 잠그고, 감옥소 소장이나 마초기질로 가득찬 간수들의 공갈 협박에 굴하지 않고, 스피커를 통해 아름다운 음악을 송출해 버린다. 감옥 안의 운동장에서 잠시 햇빛을 쪼이며 휴식을 취하던 수많은 죄수들은 그 음악 소리가 들리는 순간, 놀라운 눈동자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노래소리가 들리는 스피커를 쳐다본다. 그리고 오랜만에 무언가 해방감, 자유, 내면의 자유를 느낀다. 나는 슐라이에르마허가 말하려는 종교의 본질이 그와 같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도 모르게 감옥의 높은 담장 같은 어떤 사상이념의 담장, 특정 시대 세계관의 담장, 특정 종교의 교리와 신학의 담장 안에 갇혀서 그것에 길들여지고 참 자유를 잃어버리고 산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그 담장에 갇혀있지 말고 진정한 자유, 해방, 사랑, 인간성 존엄을 되찾아주는 것이 종교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오늘의 한국 기독교가 그럴까?


마지막으로 낭만주의의 신학자 슐라이엘마허에 관계된 칼럼을 끝내면서, 낭만주의 운동이 문학적 종교시를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우리가 존경하는 가톨릭 신자요 시인인 구상 선생의 말씀의 실상이라는 시제(詩題)의 유명한 시를 다시 음미하면서 결론을 대신하려 한다.

 

제목: 말씀의 실상(實相)(1980년작)

저자: 구상(具常)

 

영혼의 눈에 끼었던
무명(無明)의 백태가 벗겨지며
나를 에워싼 만유일체(萬有一切)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노상 무심히 보아오던
손가락이 열 개인 것도
이적(異蹟)이나 접하듯
새삼 놀라웁고

창밖 울타리 한 구석
새로 피는 개나리 꽃도
부활(復活)의 시범(示範)을 보듯
사뭇 황홀합니다.

창창(蒼蒼)한 우주(宇宙), 허막(虛莫)의 바다에
모래알보다 작은 내가
말씀의 신령한 그 은혜로
이렇게 오물거리고 있음을
상상도 아니요,
상징(象徵)도 아닌
실상(實相)으로 깨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