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철에 이미 와 있는 가을, 겨울 가운데 이미 시작되는 봄
몽골족 어린아기의 엉덩이에 푸른 반점이 남아 있듯이,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벽걸이 달력이나 일기 수첩에는 별생각 없이 넘어가는 절후(節侯)를 표시하는 작은 글자가 아라비아 숫자 옆에 2주(2週)마다 적혀있다. 금년 8월 달력엔 입추(7일)와 처서(22일)가 들어있다. 식당에서는 말복(14일) 더위를 이긴다고 몸보신으로 삼계탕이나 뜨거운 보양 음식을 땀을 흘려가며 먹는데, 식당 벽에 걸려있는 달력을 보면 입추(立秋)가 이미 지났고, 더위가 이젠 한풀 꺾여서 서늘한 날씨가 시작된다는 처서(處暑,8월22일)라는 절후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칼럼자는 현대인들이 대부분 무관심하는 태음력에 따른 달력에 아직도 표기되는 24절후 표기 한자어에 깊은 매력을 가지고 우리 조상들의 계절감각에 감탄을 느끼곤 한다. 오늘 칼럼은 달력에 관한 절후표를 생각하면서, 태음력과 태양력의 차이 또는 공간문화 유형과 시간문화 유형의 차이, 그 각각의 장단점을 생각해보는 문화신학적 단상(斷想) 이다.
달력 제작과 계절의식 및 자연의 주기적 변화
인류가 자연 속에서 생존해가려면 기후의 영향, 우기와 건기, 더위와 추위, 씨 뿌리고 거둘 때 등 논밭 농사, 과수원 관리, 가축의 번식 등에 막강한 영향을 끼치는 자연의 변화를 깊이 관찰하여 적응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있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흔히 ‘달력’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구 자전축이 23.5도 기울어진 상태로서 365일 5시간 48분 46초 걸려 태양 둘레를 한 바퀴 도는 공전 기간, 그리고 지구 주위를 돌면서 지구와 함께 태양 둘레를 돌고 있는 달의 운동과 관련되어 있다. 달력이라는 것은 지구 지표면에서 바라보는 달의 밝기와 크기변화, 그 3가지(태양, 지구, 달)의 물리천문학적, 기상변화가 주기적으로 일정한 운동을 하는 것을 기초로 하여 만든 카렌다(Calendar)를 말한다.
옛날부터 “카렌다” 제작은 고대 수메르족이 달의 밝기와 크기변화 즉 음력 초하루와 보름(삭망, 朔望)을 기준으로 하여 만들었다. 달의 밝음과 크기는 음력 초하루에서 다음달 초하루까지 혹은 보름달에서 다음 보름달까지 약 29일 12시간 44분 3초마다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일정한 변화를 기준으로 하는 태음력이 있다. 태양력은 이집트 나일강의 범람을 관찰한 고대 이집트 문명에서 발전하였다. 태양력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4계절 변화를 예측하는데 더 정확하였지만, 날마다 밝기와 크기가 달라지는 달의 변화를 보고 논밭 농사짓기에 편리하여 우리 조상들은 개화기 시기까지 태음력(음력)에 더 많이 의존하였다.
그러나, 태양력이나 태음력이나, 지구와 달의 공전주기에 걸리는 남은 자투리 시간 처리 문제가 항상 문제가 되었다. 1년을 12개월로 하거나 한 달을 30일 혹은 31일로 하지만 오차를 줄이면서 달력과 자연현상과의 불일치를 가급적 정확하게 일치 시키려고, 윤년(閏年)을 4년마다 두어서 태양력은 2월 달을 29일로 하고, 태음력에서는 5년에 2차례 비율로 1년을 13개월로 하여 달력과 실체 천체 운행과의 오차를 줄이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 문명국에서 카렌다는 태양력과 태음력의 장점을 혼융하여 ‘태음태양력’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셈이고 우리나라도 그러하다. 우리나라 2024년도 2월달은 윤월(閏月)의 해가 되어서 29일이었고, 2021-2023년의 2월달은 28일이었다.
태음력에 따르는 24절후의 묘미
이 글 서두에서 잠시 언급한바 있지만, 태음력을 많이 사용하였던 우리 조상들의 계절감각은 그 예민한 감성능력과 표현력의 멋갈스러움에 감탄하게 된다. ‘섣달그믐날’이라는 표현에서처럼 달이 지구 둘레를 돌면서 지구 그늘에 햇빛이 가리워져서 그늘이 진 달 표면은 태양 빛을 반사하지 못한다. 점점 초생달이 되고 보름이 되면 만월이 되고, 다시 점점 작아져서 그달의 마지막 날 밤 아예 달이 안보이는 그믐달이 된다. 그래서 삭망(朔望)이라 부른다.
태음력 1년은 24절후로 구성되는데, 4개의 기둥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교체되는 입춘, 입하, 입추, 입동이다. 입춘은 음력 1월 중인데 언 땅과 강물이 녹고 풀린다는 신호이다. 10월은 입동과 소설이고 11월은 대설과 동지죽 쑤어먹는 동지가 있다. 12월은 소한과 대한이라는 절후가 있고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된다.
4계절의 변화가 시작된다는 입춘, 입하, 입추, 입동을 달력에서 볼 때마다, 그리고 개구리가 잠을 깬다는 경칩(驚蟄)이나 대자연의 변화에 따라 사람 마음도 어딘지 쓸쓸해지고 서글퍼진다는 처서(處暑), 그리고 찬 이슬이 풀잎에 맺히고 서리가 내린다는 음력 9월 중에 있는 절후 한로(寒露)나 상강(霜降)을 달력에서 볼 때마다, 조상들의 ‘미학적 감수성’에 감탄을 금하지 못한다.
구약성경 전도서를 보면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 …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전3:1, 10-11)고 했다. 과연 그러하다. 우리 조상들이 비록 좁은 논밭을 경작하면서 애쓰며 살면서 고생도 많이 하셨지만, 때를 따라 계절 따라 아름다움을 느꼈고 대자연 안에서 경외감과 감사함을 가지고 24절후를 멋있게 살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어떠한가? 지난 7월의 여름 장마와 폭우로 인하여 글자 그대로 ‘기후 붕괴’라는 지연 재난 앞에서 인류는 현대 과학 문명의 한계를 절감했다. 그 근본 원인 중 하나는 현대인들이 고도로 발달한 기상학과 천문학 지식으로 인하여 계절과 기후변화는 예측하는 일엔 큰 발전을 가져왔지만, “때”(카이로스)를 분별할 줄 아는 ‘시대감각’은 거의 잃어버린 데 원인이 있지 않을까 돌이켜 본디. 예수께서 꾸중하시기를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16:3)”고 질책하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계절변화 감수성과 다른 ‘때’(카이로스)의 중요성을 강조
신약성경을 읽어보면, 예수께서 유난히 “내 때가 아직 차지 아니하였다”(요7:8)라는 말씀을 비롯하여 ‘때’(카이로스, kairos)에 관련한 말씀이 유독 많다. 단순한 계절, 절후, 물리적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성경이 강조하는 ‘때’(kairos)는 균질적이고 반복하는 연대기적인 ‘시간’(크로노스, chronos) 개념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개념이다. ‘카이로스’(때) 개념은 어떤 의미심장한 사건이나 하나님의 경륜이 현실로서 실현되고 계시되는 결정적 시간을 의미한다. 카이로스는 인간의 결단, 역사적 전환의 변곡점, 은혜와 심판의 때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의식’은 우리 조상들이 농업에 종사하면서 몸에 익힌 24절후로 느낀 ‘계절의식’과는 질적으로 다른 ‘시대의식’이다.
‘계절의식’과 ‘시대의식’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두 가지가 다 필요하고 중요하다. 그러나 ‘계절의식’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꾸중하시는 ‘천기 분별의식’일 뿐 ‘시대표적 분별의식’은 아니다. 전자는 자연에 묻힌 삶이고 후자는 삶에서 진실과 거짓 혹은 정의와 불의를 문제 삼는 역사의식이다.
21세기 지구촌이 요동치고, 한국사회가 정치사회적으로 매우 불안정하여 국민의 삶이 심히 고달프다. 정치는 실종되고 빈부격차는 심해지고 정치경제적 진영논리는 사생결단의 투쟁장으로 변해간다. ‘공정, 상식, 자유라는 이념 가치’를 깃발 위에 크게 쓰고 정권을 획득한 윤 정권의 정치행태는 내걸었던 정치적 이념의 정반대 방향으로 계속 퇴행하여 국민을 기만하고 우습게 본다. 민주주의 시대가 아닌 절대군주 왕권 시대가 되살아 난듯한 현실이다. 기독교 성직자 1004명의 대통령 ‘자진사퇴권고’ 시국 선언문까지 나왔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다른 한편, 야권의 강력한 차기 대권 후보자 이재명 씨의 정치적 구호가 요즘 듣거나 발음하기도 어려운 낯설고 거북한 신조어(新造語) ‘먹사이즘’으로 표현된 것도 진정한 ‘시대정신’의 퇴행으로 느껴진다. ‘먹고사는 문제’는 중산층 이하 서민들에겐 생사가 달린 시급한 문제이긴 하지만 근본해결책이 아니다. “근본이 바로 서면 살길이 생긴다’(本立而道生)는 옛글이 있다. 주권자로서 국민이 나라의 진정한 주인이 되고, 실질적 민주주의 사회로서 어떤 예외나 특혜 없이 ‘법 앞에 평등한 정의’가 바로 서는 일이 민생 해결의 시작이라야 한다. ‘민생복권, 주권회복’이라는 구호면 되는 것이지 ‘먹사이즘’은 정치철학적으로 낙제점을 줄 수밖에 없는 실패한 신조어이다.
빈 그릇에 빗물이 차오르듯이 “때가 차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다. 카이로스는 심판의 때이기도 하지만, 참회하고 진심으로 거듭나는 개인과 집단에겐 “구원과 은혜의 때”가 될 수도 있다. 8월엔 24 절후 중 ‘말복’(末伏)이 있지만 ‘입추’와 ‘처서’ 사이에 있으며 진정한 해방을 기다리는 광복절이 있는 달이다. 우리 모두 ‘계절의식’과 ‘역사의식’을 동시에 지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