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통적 원죄론의 허(虛)와 실(實)
오늘날도 정통적 기독교 설교강단에서는 인간 원죄설을 중요한 교리 중 하나로서 강조한다. 그것을 강조해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설이 더 효능적 힘을 얻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통적 원죄설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물으면 다소 당황하게 된다. 성경문자주의 무오설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원죄(原罪)는 맨 처음 인간조상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던 용서하지 못할 범죄를 말한다. 그 범죄의 대가는 인간의 ‘흙으로 돌아갈 죽음, 노동과 산고의 고통, 그리고 에덴의 동산에서 추방’으로 요약된다(창3:1-24). 그리고, 아담과 이브의 이 결정적 단 한 번의 범죄 대가는 그들의 후손들에게 유전적으로 영향을 끼쳐 모든 인류도 원죄의 징벌아래 있다는 교리이다.
그러나, 중세기가 끝나고 근세 이후 특히 17-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이후, 인간사회는 정통적 원죄론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 우선 창세기 3장 타락설화를 역사적 실제사건으로 이해하는 문자주의적 성서해석을 비판하여 창세기 3장 경전내용은 어떤 종교적 의미를 말하려는 ‘설화’(說話)라고 본다. 뿐만 아니라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과 범죄의 대가를 그 후손들에게까지 무조건적으로 책임을 묻는 것은 하나님의 공정한 정의에 어긋난다고 본다. 가장 결정적으로 원죄설을 의심하게 만든 이유는 원죄의 유전적 계승이론의 허구성을 지적한다.
죄란 인간의 인격적 자유와 정신적 영적 책임성과 연결될 때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인데, 인간의 성욕을 죄악시하고 인간 부부의 성관계를 통해 생물학적 유전형질이 후손에게 유전될 뿐만 아니라 죄성도 유전된다는 주장은 인간의 생물학적 유전자이론을 자유, 인격, 책임성, 독립성을 지니는 후손에게 무조건 짐 지우는 어불성설의 불합리하고 무자비한 어리석은 교리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상은 정통적 원죄론이 지닌 허구성이다.
그렇다면, 원죄설은 이제는 아무런 실질적 의미를 갖지 못하는 폐기처분하여 버려지고 무시해버려도 좋은 무가치한 것이란 말인가? 경박한 인본주의 신학자들이 아닌 진지한 철학자나 신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독교 원죄론은 인간이해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진리를 말하는 것이고, 창세기 타락설화는 깊은 상징적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고 본다.
계몽주의 완성자라고 칭함 받는 임마누엘 칸트도 ‘근본악’(根本惡)을 말했고, 폴 틸리히는 원죄론이란 “인간실존의 근본적 소외성”을 지시한다고 했고, 라인홀드 니버는 원죄성의 핵심은 “인간의 자기중심적 이기심”이라고 보았다. 오늘날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원죄성은 누구나 피하지 못하기도 하고 빨려 들어가는 ‘편견과 탐욕’ 문제라고 필자는 보고 싶다. 그 점을 이번 칼럼에서는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오늘 한국사회와 美, 中 G2 열강을 두 축으로 하는 위험수위에 다다르는 지구촌을 직시할 때 무엇이 문제인가? 특히 한국사회는 2022년 3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민의 심성은 ‘편견과 탐심’으로 완전히 갈기갈기 찢겨지고 분열되어 서로 사생결판 혈투를 벌이고 있다. 문대통령의 국정 수행평가를 놓고만 보더라도, 문대통령 정부가 잘못한 점도 많지만 국민의 40% 전후는 긍정적 평가를 한다. 다른 한편, 야권에서는 0(제로)% 평가절하도 부족하여 망국과 이적 행위자라고까지 악담하는 부정적 평가의 국민수가 역시 40% 전후를 나타낸다. 이런 양극화 현상은 보통문제가 아니다. 기독교 신학은 그 근본원인을 성찰하고 타개책을 제시해 보아야 한다.
2. 심층심리학과 지식사회학에서 본 ‘탐심’의 분석
한국사회에서 2대종단이라고 일컫는 기독교와 불교에서도 가장 큰 죄의 이름으로서 탐심 혹은 탐욕이 제일 첫 번째 자리를 공통적으로 차지하고 있을 만큼 탐심(탐욕)은 인간학의 근본문제이다. 기독교 전통에서 3대죄(3大罪)는 탐욕(concupiscence), 교만(hubris), 불신앙(unbelief)을 꼽는다. 불교에서 3독심(3毒心)은 단어를 줄여서 흔히 ‘탐진치’(貪瞋痴)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욕망, 분노, 어리석음이다.
기독교와 불교가 공통적으로 큰 죄라고 규정하는 탐욕은 인간이 생물학적 존재로서 생존본능에 필수적인 식욕이나 성욕 등 단순한 욕망이 아니다. 인간 이외 어느 동물도 평생 사용하고도 다 사용 못할 필요이상의 물질적 점유를 시도하는 경우는 없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간의 탐욕(탐심)은 인간 본성 속에 만족할 수 없고 잠재울 수 없는 근본적 갈증 해소를 위한 끝없는 욕망이 있는 것 같다.
물질적 재화의 증식과 소유를 향한 무제약적 재산욕망, 돈 쥬앙(Don Juan)적인 성적욕망, 성직자들에게도 끈질긴 명예욕망은 정신분석학적 시각에서 보면 일종의 질병이다. 자기를 과시하고 자신의 유한성을 그런 것들로서 보완 혹은 보상해 보려는 절박한 심리다. 철학적 신학용어로 말하자면 ‘죽음예견’ 곧 인간의 유한성과 허무성을 잠재의식이 감지하면서 몸부림치는 ‘존재론적 불안의식’을 감추려는 몸짓이다. 그것이 실존적 인간존재의 무한탐욕의 비밀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나머지 다른 두 가지 큰 죄 곧 교만(hubris)과 불신앙(unbelief)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영적 쿠데타의 감춰진 동기라고 한다면 그 실행적 행동 쿠데타 현상이 욕망 또는 무한 탐심으로 나타난다. 불교에서도 나머지 다른 두 가지 커다란 마음의 독(毒)으로 규정된 진에(분노)와 우치(만물의 因緣生起 理致를 모르는 어리석음)보다 탐심을 첫 번째로 나열하는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쉽게 생각해보자. 불교에서는 고타마 시타르타가 깨우치고 설법한 가장 중요한 핵심 종지가 “삼라만유 그것 자체가 독자적 실체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이런저런 원인과 관계가 어우러져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잠정적 존재들이요 일시적 현상들이다”라고 가르치는 ‘인연생기론’(因緣生起論)이다. 그러한 가르침을 불자들은 일생동안 귀가 아플 정도로 수천 번 듣고 공부하고 다짐하고 수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조계종이라는 최대불교집단의 상층부를 형성하는 고승들 사이에 권력다툼, 재산다툼, 고답적인 명예욕의 추태가 왜 그치지 않는 것인가? 단순하게 불교핵심종지를 깨우치지 못해서 그렇다고 설명되지 않는다. 인간은 우주와 인간의 존재가능에 필요한 원리와 이법을 다 알고서도 욕망과 탐심에 사로잡히는 실존인 것이다.
인간실존의 탐심과 탐욕의 발생, 작동, 지속과정은 너무나 오묘하고 복잡해서 실존적 존재인 인간 스스로도 그러한 줄 모르게 빠져들고, 강화하고 은폐하고 자기를 정당화하는 확신범이 된다. 왜 그럴까? 지식사회학(知識社會學)은 인간의 지식이나 정신문화의 일반적 주장들, 다시 말해서 철학적 이념, 사회/정치/경제학적 신념 등은 역사적 사회적 조건들의 관계성 안에서 형성되는 것임을 주장하는 문화사회학의 일종이다. 독일학자 칼 만하임(Karl Mannheim)이 그 대표적 인물이며 그의 유명한 저술물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 지식사회학은 인간의 지식과 이론주장이 순수하거나 만고불변의 정당성을 지니지 못하고 그 신념, 이념, 교리를 주장하는 개인이나 집단의 사회적 이해관계에 자기도 모르게 오염되고 있다는 것을 밝히는 학문이다. 그들의 핵심적 주장을 한마디 개념으로 표현하는 어휘는 ‘사유의 존재 제약성’(思惟之存在制約性)이라는 용어이다.
쉽게 생각해보자.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조사회 안에서 왕들과 귀족들, 그리고 그 사회를 이끌고 가던 엘리트 지식인 집단은 사회적 신분제도나, 토지의 독점권 등이 당연한 합당한 질서이며, 심지어 하늘이나 신이 인가해준 신성불가침의 것이라고 주장했고 실제로 그렇다고 굳게 믿었다. 근세 이후 사회질서에서 자본주의적 사회가 발전하면서 형성된 서양의 부르주아 계층들이나 오늘날 신자유주의 세계질서와 코로나펜데믹 환경 안에서 형성된 새로운 귀족층들도 그들의 재산과 특권을 유지해주고 보장해주는 정치이념과 사회법 질서가 가장 옳고 선한 좋은 질서요 진리라고 믿는다. 다른 생각이나 사회변혁 세력집단이나 주장은 반국가단체, 빨갱이, 이단론자, 위험집단이라고 주장하고 그런 자들의 퇴출과 박멸을 옳다고 확신한다.
흔히 통상적으로 말해서 하나의 살아있는 사회는 세 가지 영역의 인간 활동의 상호협력과 상호견제 속에서 발전한다고 말한다. 그 세 가지 범주는 정치권력(입법, 행정, 사법부 권력), 경제권력(기업, 금융, 무역유통 권력), 문화권력(언론, 대학, 문화예술, 종교)의 삼분법이 그것이다. 그런데 가장 위험하고 불행한 사회는 세 분야의 엘리트들이 일종의 암묵적 카르텔을 형성하여 기득권을 강화하고, 그 사회를 극단적인 빈부양극화 사회, 이념적 갈등사회, 진보보수 진영 간 투쟁사회로 고착시키는 상황에 처한 사회이다. 작금 한국사회가 그런 사회적 질병현상을 노정하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위기인 것이다. 대통령 선거라는 정치적 정당간의 권력투쟁을 계기로 이러한 사회 양극화현상 분열대립 현상이 그 사회의 공멸과 해체로 이어질 만큼 심각한 수준에로 도달하고 있다.
3. 해석학에서 본 인간의 ‘근본악’으로서 ‘편견’의 문제
20세기 동안 정신과학 분야에서 이루어진 학문적 결실 중 한 분야에 해석학(hermeneutics)이 있다. 해석학이란 글자 그대로 텍스트를 바르게 이해하는 이론이다. 텍스트에는 경전, 소설 등 문학작품, 미술작품, 오선지에 그려진 음악 악보 등 문자나 기호로 표현된 것이 있다. 그러나 텍스트는 반드시 문자나 기호로 표현된 것만 아니다. 인간사 생활 속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 신문에 나오는 정치적 기사거리들, 사람 얼굴표정 등도 텍스트가 될 수 있다.
현대 해석학에서 더 중요한 학문적 논쟁은 텍스트를 “바르게 이해하는 기술이론”이 아니라 도대체 객관적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 마음속에 일어났던 체험과 그 표현들을 ‘이해’한다는 것이 왜 가능하며, “이해란 무엇인가? 이해는 아무 전제 없이, 자연과학자들이 물리적 자연법칙에 따라 자연의 운동을 이해하고 계산하고 예측하듯이, 정신과학 영역에서도 엄밀하고 객관적으로 타당한 이해가 가능한 것인가?”의 물음이 큰 문제였던 것이다.
흔히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앞에 놓고서 “우리 서로 마음을 비우고,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이 사건과 문제를 이해해보자!”고 말한다. 고의적 선입관, 악의적 편견, 이해타산에 마음이 이미 오염된 주장을 하지 말자는 다짐이다. 성숙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러한 자세 곧 선입견 없이 마음을 비우고 텍스트 곧 기록물이나 사건을 바르게 이해하려는 자세를 취해야 옳다. 그러나 조금 더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마음을 비운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마음을 백지상태로 만들어놓고, 흰백지에 그려지는 텍스트나 사물을 사진 찍듯이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특히 정신과학의 산물인 텍스트와 역사적으로 발생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큰 사건의 의미를 ‘이해’ 하려할 때, 백지상태의 비운 마음으로서는 이해작용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현대 해석학 학문의 결론이다. 사람의 마음이나 두뇌활동은 카메라와 같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이나 생각하는 두뇌는 텍스트를 대하고 사건을 이해하기 이전에 이미 어떤 삶의 체험으로 형성된 관점, 가치 지향성, 옳고 그름, 선하고 악함, 아름답고 추함 등에 관하여 어떤 전이해(前理解, pre-understanding)혹은 선입관(先入觀, preconception)을 가지고 있다. 전이해(前理解)와 선입관(先入觀)은 편견(偏見, prejudice)으로 변질되기 쉽지만, 그 세 가지 단어의 의미는 조심스럽게 구별되어야 옳다. 전이해와 선입관은 굳이 고의성을 갖는 마음 상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삶 체험 속에서 형성된 이해의 밑바탕이다. 텍스트, 사물, 사건을 바라보는 일차적 관점이다. 그러나 편견은 고의적 감정, 의도적 적대감이나 호불호 감정에 물든 마음 상태를 말한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일군의 군인들은 엄중하게 헌법이 금지시킨 정치적 개입활동금지 조항을 무시하고, 무력정변 곧 쿠데타(coupdetat)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그 뒤 한국 사회는 군사정권이 약 30년간 지배하게 되었다. 한국 현대사를 규정짓는 이 군사반란 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과 이해 곧 ‘해석’은 동일하지가 않았다. 왜 동일한 역사적 사건을 두고 이해와 평가가 다를까? 사건을 당하여 반응하기 전, 사람이 갖는 전이해(前理解)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사회는 5.16 군사정변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근본적 문제를 핵심으로 하여 그 사건을 긍정적으로 보려는 보수집단과 부정적으로 보려는 진보집단으로 양분되게 된다.
긍정적으로 보려는 보수적 집단은 박정희의 쿠데타는 5.16 당시 극도의 정치적 혼란과 사회 무질서를 잠재우고, 남북대결 상태에서 공산화를 막고, 군사정권 연장을 통해서 극도의 국민경제 빈곤상태를 극복하는 산업화를 이룩한 공적을 지적하면서 쿠데타를 긍정적으로 본다. 한국 현대사(1960-1990)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유린, 민주정치제도 중단, 기생관광 등 사회도덕심의 타락, 빈익빈 부익의 양극화, 지방색의 고착화, 농민과 노동자들의 희생 등은 어쩔 수 없는 ‘필요악’ 정도로 가볍게 이해한다.
다른 한편, 5.16 군사정변을 부정적으로 보는 진보적 입장은 전혀 다른 평가를 하게 된다. 군인들이 총칼을 들고 무력으로서 장권을 잡는 일 자체가 원천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고 본다. 군사정변은 호랑이 등에 올라탄 사람이 내려오면 잡혀먹이게 되니까 어찌하든지 계속 달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장기집권의 명분을 만들려고 한일 굴욕외교를 통한 국교정상화를 강행하여, 한국 산업화의 기본자금으로 삼고, 자본주의 경제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국가주도의 중앙집권적 정치, 경제, 문화 권력의 독점지배사회를 만들었다. 인권, 민주질서, 언론의 자유나 집회결사의 자유 등은 철저히 억압되고 재벌기업과 보수언론의 장악을 통해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대중마취제 구호를 내걸고 인간이기를 그치고 돼지처럼 묵종하며 살기를 강요한 어두운 시대였다고 이해한다.
부마사태의 민중항쟁을 군사력으로 진압하려는 군사정권 상층부의 의도를 간파한 김재규라는 중안정보부장이 박정희를 살해함으로써 박정권의 마성적 통치 전략에 종지부를 찍게 하였다. 김재규는 전두환의 신군부세력에 의해, 국가원수 시해범으로서 사형 집행되었다.
현대 한국인이라면 다 알고 있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역사를 잠깐 언급하는 이유는 왜 동일한 5.16 쿠데타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입장이 그렇게도 서로 다를 수 있는가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기 위함이다. 앞서 언급한 지식사회학과 해석학의 이해이론에 의하면, 텍스트와 역사적 사건을 해석하는 전이해(前理解)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전이해(前理解)를 구성하는 결정적 중요 요소들은 그 사람이 어떠한 ‘생활환경’ 속에서 성장했는가, 사회경제적 이해관계에서 안전하고 부유함을 누린 기득권자인가 아닌가, 다른 이웃사람의 희비애락에 감정이입 할 수 있는 공감능력과 역지사지(易地思之) 할 수 있는 자리바꿈의 상상력이라도 남아 있는가 없는가 등이 그 사람의 전이해(前理解)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들이다.
‘편견’은 현대인들의 원죄성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나친 ‘편견’은 편견을 지닌 집단이나 개인을 병들게 하고 역사의 진로를 뒤틀리게 한다. 집단적 ‘편견’은 플라톤이 『공화국』에서 비유로 말한 ‘노예들이 갇혀있는 깊은 동굴’ 같아서 그 동굴에서 탈출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있다. 어떤 용기 있는 노예가 동굴 밖 광명천지 세계를 직접 체험하고 돌아와서 동료 노예들에게 말해줘도, 그들은 믿지 않고 도리어 ‘안정된 질서’를 혼란하게 만드는 선동가로서 규탄하고 매장시키고 만다.
글을 맺으며 국민들의 편견을 더욱 가속화 시키고 요지부동의 신념체계로 탈바꿈 시키는 5대공신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들 5대공신은 타락한 언론, 변질된 보수종교 집단, 지식을 팔고 사는 대학교수들과 문화인들, 그리고 돈줄을 대는 대기업체, 마지막으로 국민을 그들의 밥으로만 아는 타락한 권력집단이다. ‘편견과 탐욕’의 정신적 동굴에서 벗어나서 밝은 태양 아래에서 바르게 세상을 보는 눈을 갖게 하는 것, 그것이 참 종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