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4일 서울신학대학교 징계위원회가 이른바 “유신진화론”을 주장한다는 박영식 교수를 해임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이 결정은 이사회에 통보되고 이사회에서 최종 결정이 내려진다고 합니다. 이에 관해 한 조직신학자로서 본인의 입장을 밝히고자 합니다.
1. 진화론은 이른바 “절대 진리”가 아닙니다. 물론 그 속에 타당한 내용도 있지만, 학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많은 문제점을 가진 하나의 “학문적 이론”이라고 많은 학자들은 주장합니다. 진화론이 말하는 “생존 투쟁”이 생물계의 삶의 법칙이 아니라, “상부상조”와 “상생”이 그 법칙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학문의 세계에서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절대 진리”라는 것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미시세계에서 세계의 사물들은 “객관적으로 확정될 수 있는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확정될 수 없는 “에너지 장” 혹은 “안개”와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에너지 장은 학자들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고 물리학자들은 말합니다.
임마누엘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사물 자체”(Ding an sich)를 인식할 수 없고, 단지 그것의 “나타남”(현상, Erscheinung)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나타남”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감지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른바 “절대 진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화론 역시 “절대 진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세계의 모든 것이 무(無)에서 우연히 있게 되었다는 진화론과 빅뱅이론의 전제는 증명될 수 없는 하나의 학문적 “확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창세기 1, 2장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창조, 이른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가 “절대 진리”라고 주장합니다. 이른바 “절대 진리”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영원한 타당한 “사실”(factum)을 뜻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른바 “창조과학자들”은 창세기 1, 2장의 기록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창세기 1, 2장의 말씀들은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사실들”(facta)의 영역에 속한 “자연과학적 사실”이 되어버립니다. 창세기 1, 2장의 글자 하나하나가 “절대 진리”가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창세기 1, 2장의 말씀들은 세계의 생성에 관한 “자연과학 교과서”가 되어버립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은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심각한 문제점을 가집니다. 만일 창세기 1, 2장의 말씀들이 자연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자연과학적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 말씀들에 대한 신앙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사실들”을 신앙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그것을 머리로(이성적으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3. 그럼 구약성서 기자들은 우리에게 “자연과학적 사실들”, 곧 그들이 알고 있는 세계 생성에 관한 “자연과학적 지식들”을 전하기 위해 창세기 1, 2장을 기록한 것일까요?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창세기 1, 2장의 말씀들은 “어처구니 없는”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창세기 1장에서 “하늘”은 “궁창”, 곧 물을 막아내는 튼튼한 막 혹은 천막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은 하늘을 “물을 막아내는” 것, “물과 물을 나누는” 것으로 묘사합니다(창 1:6). 오늘날 이같은 “자연과학적 사실”, “자연과학적 지식”을 인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또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함께, 동시적으로,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했음에 반해, 창세기 2장에서는 남자를 먼저 지으시고,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고 얘기하는 모순을 보이기도 합니다. 여자를 남자 “갈빗대”로 만들었다는, 그래서 여자를 영원히 남자에게 귀속된 존재로 보는, 이같은 여성비하적 얘기를 “절대 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2:4 상반절까지의 말씀들은 하나님을 “엘로힘”이라고 부름에 반해, 2:4 하반절부터의 말씀들은 하나님을 “야웨”라고 부르는 것도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입니다.
3. 한 마디로 창세기 1, 2장의 성서 기자가 우리에게 전하려는 것은, 그들이 알고 있던 고대시대의 자연과학적 지식들이 아니라, 세계는 하나님의 결단으로 말미암아 있게 된 “하나님의 것”이요, 세계를 있게 하신(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며, 세계는 결국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그들의 신앙을 고백하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특히 창세기 1장에서 2:4 상반절까지의 말씀들은 제2이사야서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 신앙이 위협을 받던 바빌론 포로기에 기록된 역사적 배경이 나타난다는 것은, 양식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1, 2장에 기록되어 있는 이른바 “자연과학적 지식들”은 이 신앙을 고백하기 위해 성서 기자들이 사용한 “수단들”일 뿐이지, 이른바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자연과학적 사실들”, “자연과학적 지식들”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오늘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창조를 문서로 기록해야 한다면, 틀림없이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의 자연과학적 지식을 통해, 우리의 언어로 이것을 기록할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창세기 1, 2장의 말씀들을 “자연과학적 사실들”, “자연과학적 지식들”이라고 주장하는 “억지”를 우리는 버려야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필자가 진화론을 절대 진리로 생각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4. 결론적으로 서울신대 박영식 교수가 이른바 “창조과학”을 부인하고 진화론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그를 파문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창세기 1,2장의 말씀들은 “과학”이 아닙니다. “자연과학 교과서”가 아닙니다. 성서 기자들이 우리에게 전하려는 것은 “자연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 창조와 그의 주권과 세계 구원에 관한 신앙입니다. 우리는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의 신앙을 증언할 뿐이지,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고대인들의 자연과학적 지식을 “믿으라”고 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서가 증언하고자 하는 “내용”을 보아야지, 글자 자체를 절대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화론을 “절대적인 것”으로 인정할 필요도 없고, “거짓말”이라고 부인할 필요도 없습니다. 진화론은 하나의 과학적 이론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세계 만물은 변하고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확신, 신념, 이론, 윤리와 도덕도 그 속에 가설의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1+1=2를 절대 진리라고 생각하지만, 수학자들에 의하면 수학의 모든 공식들도 가설에 입각해 있고, 바로 여기에 현대 수학의 “위대함”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지도자들은 “절대”라는 말을 아주 조심스럽게 사용했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주님 안에 계시되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외에 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교리도,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도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절대”의 이름으로, “교리”의 이름으로 한 신학자의 삶과 가정을 파괴하고, 한국 개신교회를 또다시 세상의 비웃음거리로 만드는 일을 중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황덕형 총장이 말하듯이, 서울신학대학이 정말 “창조론의 연구에 있어서 대학의 다양한 이론들과의 학문적 대화를 추구”한다면, 박영식 교수의 입장을 하나의 “학문적 입장”으로 인정하고 학문적 대화를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학문적 문제는 학문적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지, “교수 파면”이란 “교단 정치적 결단”으로 끝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김균진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신학아카데미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