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본성의 역설적인 두 측면을 동시에 직시해야
한국의 5월은 가장 아름답고 동시에 잔인한 달이다. 연푸른 감나무 잎새들처럼 파릇파릇 자라나는 어린이날, 하늘같이 고마운 어버이날, 삶의 길을 가르쳐주신 스승의 날, 종교적으로는 석가탄신일과 성령강림절 등등이 모두 5월에 들어있다. 세상 이치가 빛과 그림자처럼 대칭이라서 그럴까? 수백 년간 천대받고 억업받던 노동자들이 일어선 근로자의 날, 5.16 군사 쿠데타, 주권자인 국민을 국군이 살육한 5.18 민주항쟁 등도 모두 5월에 들어있다.
한국인 삶의 굴곡이 가장 대칭적으로 깊고 높았던 5월의 달력을 넘기면서 필자는 새삼스럽게 5월의 한국 사회가 첨예하게 서로 양분되어 있다는 현실을 다시 한번 심각하게 체감하게 된다. 국회에서 결의한 ‘간호사법’ 제청안이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말미암아 실질적으로 비토(veto)되면서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본질과 자유의 오남용에 대해서 다시 심각하게 되새김하게 된다.
이 글은 ‘신학적 인간학’의 관점에서 현대인이 그저 좋은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속내를 깊이 들여다보려는 칼럼이다. 오늘의 칼럼은 20세기 미국의 저명한 기독교 윤리학자 라인홀드 니버(R. Niebuhr)가 민주주의에 대하여 언급했던 유명한 명제를 먼저 내걸고 칼럼을 이어가려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의를 위한 인간의 능력이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고, 불의에 기울어지는 인간의 경향성이 민주주의를 필요로 한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고 자유를 행사할 권리를 갖는다는 ‘자유사상’과, 정치제도는 삼권분립의 형태여야 하고 정치지도자와 권력집단은 주권자 국민들의 선거에 의해 교체될 수 있어야 한다는 ‘민주주의’에 대한 현대인들의 신념은, 오랜 투쟁과 시행착오를 거쳐서 계몽주의 시대 이후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성립되었다. 민주주의 제도의 대표적 국가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의 인권과 자유가 법률로 확립된 것은 링컨 대통령(1809-1865) 시대 곧 지금부터 불과 150년 전이다.
신학적 인간학에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의미의 핵심으로서 ‘창조 능력과 자유 능력’을 강조한다. 인간은 흙으로 지음받은 ‘자연의 자녀들’이지만 생물학적 본능이나 물질적 인과율에 얽매이지 않고, 창조하고 자유롭게 사귀고 사랑하는 능력을 부여받았다고 믿는다. 그런데 바로 그 ‘자유 능력’이 창조주를 배반하고 이웃을 무시하고 수탈하는 ‘죄짓고 타락하는 능력’의 원천이 되는 역설적 성격을 지닌다.
사자나 오랑우탄은 거칠고 사납지만 타락하지 않는다. 약한 것들을 먹이사슬 구조 속에서 잡아먹지만 사자는 죄를 모르고, 사자와 가젤은 함께 물 마시는 강과 호수를 공유한다. 사자가 호수나 강물을 독점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정치제도는 흔히 오해하듯이 인간을 낙관적으로만 보는 정치제도가 아니다. 인간 본성 속에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공격적이고, 으스대고 군림하려는 병든 권력지향적 죄성을 깊게 직시한다. 물론 공동선을 이뤄가려는 인간 본성의 선한 의지와 동기와 능력 때문에 민주주의는 가능하다. 그러나 인류가 여러 가지 정치제도를 역사 속에서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가장 바람직한 정치제도라고 판단하고 채용하는 진짜 이유는 “불의(不義)로 기울어지기 쉬운 인간의 범죄적 가능성을 가능한 한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필요에 의해 만든 정치제도이기 때문이다. 그 구체적인 제도적 구조는 삼권분립제도, 열린 사회를 위한 언론의 비판의 자유, 시장경쟁에서 독과점적 경제권력의 남용을 막는 자유시장 경제제도 등으로 나타난다.
힘 있는 자들의 문명 포장지로 전락한 ‘자유와 민주주의’의 위기와 실종
올해도 어김없이 5.18 광주민주항쟁 기념 묘원과 광주지역을 방문하려고 여당과 야당의 정치인들이 특히 앞다투어 열심을 낸다. 왜 갑자기 그런 열심을 내고 비참했던 광주민주항쟁 사건을 입에 바르게 칭송하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1980년 광주민주항쟁 사건은 권력에 의해 다 죽어가던 민주주의의 가치, 생명 존엄의 가치, 자유의지의 숭고한 희생의 가치를 다시 바로 세웠고 목숨 걸고 지켜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숭고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지 어언 43년이 되면서, 언제부터인가 광주민주항쟁의 본래 깊은 의미는 온갖 정치구호, 정치선전, 문화장식품으로 전락해가고 있다.
국민여론조사에 의하면 윤석열 대통령이 민주주의의 기본가치인 삼권분립과 존중, 서로 이해와 견해가 다른 정치집단들과의 협치, 노동자․농민․간호사들의 애로사항 경청 등을 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견해가 60%를 오간다. 그런데, 지난 1년간 윤 대통령이 국내외에서 행한 강연과 정치구호 중에서 언급 빈도가 가장 높은 두 개의 단어는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어휘이다. 국민들은 뭔가 앞뒤가 안 맞는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자유나 민주주의라는 고귀한 어휘가 부도수표가 되었고, 가진자들과 권력자들만이 독점하고 누리며 자신들의 행위 명분으로 사용하는 ‘정치문화적 장식물’이 되었다는 비애감을 느낀다.
성숙한 개방사회는 인간본성에 대한 극단적 비관주의와 낙관주의를 경계함
이 칼럼의 본래 취지에로 돌아가 보자. 왜 라인홀드 니버는 민주주의 제도가 인간본성의 선의지 때문에 가능하지만, 악한 의지 때문에 필요한 제도라고 말했던가? 신학적 인간학 관점에서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현실 세계에서 책임적 크리스천 윤리를 실천하려면, 인간본성에 대한 지나친 비관주의와 지나친 낙관주의를 동시에 극복해야 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정통적 신학에서 인간본성에 관한 지나친 비관주의는 인간본성의 ‘전적 타락설과 원죄설’로 표현되었고, 정치혐오증, 기피증을 지니면서 ‘정의를 실현하려는 책임적 참여’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3.1 기미독립운동 과정에서 당시 선교사들과 기독교 상층지도부에서 ‘정교분리론’을 내세우고 소극적이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근본주의적 정통보수 신학과는 좀 다른 라우센 부쉬의 ‘사회복음 윤리설’도 크리스천 개인의 자발적 자기 헌신과 봉사를 통해 ‘이웃사랑 계명’을 실천하려는 입장에 머물렀기 때문에 집단적 이기심과 집단악에 대하여 무력감, 좌절감, 도덕적 위선만 가져다 주었다.
다른 한편 인간본성에 대한 지나친 낙관주의는 서양기독교 사회사에서 인본주의적인 자유주의 신학에서 표출되었다. 사회혁명과 사회진화와 교육문화 개량 및 발전을 통해 이뤄질 것이라는 유토피아적 역사 낙관주의는 1, 2차세계대전, 볼셰비키 공산혁명, 베트남전쟁과 한국전쟁, 그리고 오늘날 지구촌을 종말적 생태학적-기후붕괴 위기상태로 빠뜨리는 “무절제한 탐욕과 비인간적 인류문명”을 낳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자유와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말장난 같은 권력자들의 정치문화 장식품이 되고, 정치집단들의 자기합리화의 방패물로 전락해 있는 현실에서 어떻게 우리는 사람다운 얼굴을 지닌 사회를 회복할 수 있을까?
대답은 하나뿐이다. 성경과 기독교 신학이 말하는 인간본성에 대한 역설적 통찰, 곧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엄한 존재이면서, 죄짓고 우쭐대는 어리석은 이기적 존재로서 죄인”이라는 고백과 함께, 민주주의 제도는 인간의 선의지 때문에 가능하고 악한 의지 때문에 더 필요한 제도라는 것을 깊이 명심하면서,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택하는 지혜와 용기”를 가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