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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암신학칼럼-김경재 24 / 10월] 알곡과 가라지의 분별은 가능한 진실일까?

글쓴이 : 연구소 날짜 : 2023-11-21 (화) 18:44 조회 : 799

김경재의 혜암칼럼 24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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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곡과 가라지의 분별은 가능한 진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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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재 박사(한신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신학아카데미 자문위원)

도덕적 무규범주의, 상대주의, 사이비 중도론을 넘어서

 

추수의 계절이다. 성실한 농부는 "콩 심은데서 콩나고 팥 심은데서 팥난다"는 만고불변의 진실을 밭두렁과 논밭에서 확인하는 계절이다. 성실하고 진지하게 일생을 살고 가는 독실한 신앙인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가두리라"(6:7)는 사도의 말씀을 확인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 솔직한 오늘의 세상 모습이다. 성경 전도서에서 말하듯이,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다"(4:16)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눈으로 보고 직접 체험하면서 믿음이 시험에 들기도한다. 악인들은 잘살고 선행과 애국하던 후손들은 천대받고 사는 세상이다.

 

도덕 기준이란 없다는 무규범주의와 윤리 계명이란 문화적 산물이라는 상대주의와 심지어 '악의 평범성'(한나 아렌트)이 당연한 현실인양 기승을 부리는 세태를 우리는 보고 있다. 그래서, 사이비 지식인들은 엉터리 중용자도(中庸之道)를 설파하면서 이방원과 함께 "이런들 어떠히며 저런들 어떠하리.." 읊조리면서 권력, 물욕, 명예욕에로 사람들을 홍수처럼 쓸어간다.

 

세상 끝날에, 아니 내 일생이 끝나는 날에, 알곡과 가라지는 구별되고 악행과 선행은 철저히 분별된다는 예수님 말씀은 진실일까? 예수님 말씀을 다시 상기헤 보고, 20세기 대표적 지성인이라 인정받는 신학자 폴 틸리히와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그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는가 살펴보려는 것이 오늘 컬럼의 목적이다.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 말씀과 함께 단호한 말씀도 하신 분

 

기독교인은 예수님의 아가페적인 무한사랑과 가이없는 용서의 말씀에 신앙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의 화신체요, 형제의 죄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치신 분이다.

 

그러나 복음서를 자세히 드려다 보면 예수님의 교훈에는, 요즘 자기에게 너무 관대하고 삶의 기준을 자기 편하게 낮게 낮추고,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생소하리 만큼 엄정한 말씀도 있다. 복음서에서 몇 가지 사례를 생각해 본다.

 

(i)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5:17,19)

 

(ii)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5:48)

 

(iiI)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25:45)

 

(IV)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저 넣으리니..(13:40-41)

 

위에서 예시한 말씀에 더하여 더 많은 성경 구절을 증거로 댈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동안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은총, 예수 십자가의 대속적 속죄, 인간 본성의 원죄성과 전적 타락설 등의 가르침에 너무 기대어, 예수님의 단호한 가르침을 소홀히 여기고, 우리 자신의 니약함과 나태함에 대하여 스스로 너무나 관대하게 여겨온 것아닐까? 거기에 더하여 소위 복음서 연구자들이 말하는 성경 말씀의 전승비평, 편집비평, 역사비평 등 각종 본문 비평학에 너무 경도한 남어지, 마치 그런 단호한 말씀은 예수님이 직접하신 것이 아닐거라는 경솔한 가설을 가르치는 신학 교수들도 있다.

 

본회퍼가 경고한대로, 복음이 주는 하나님의 은총은, 값으로 계산 할 수 없을 만큼 너무 크고,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서 절정에 아른 사랑은 헤아릴 수 없을 만한 무량애(無量愛)인 것이지 '싸구려 은총'이 아니다. 인간의 책임성과 성실성을 면제하거나 가볍게 대하라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삶이 끝난 이후에, 혹은 역사과정에서 모든 것을 마무리하는 종말의 그 날에, 알곡과 가라지를 가려내는 엄정한 구별과 그에 따르는 응분의 조처가 없다면 궁극적으로는 인간 세상의 도덕, 종교, 휴머니즘은 무너지고 만다.

 

실존적 휴머니스트들은 인간의 선행과 악행에 대한 보상이나 징벌론을 운위하는 것 자체는 고대사회 '인과응보사상'에 갇힌 유치한 생각이며, 인간 스스로 자신의 존엄성과 성실성에 충실하면 그만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칸트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알곡과 가라지를 분별한다'는 예수님의 교훈을 유치한 윤리 사상 혹은 악에 대한 보복적 응징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먼지나 들풀 같은 연약한 인간들의 100년 살이 행각을 일일이 꼬치꼬치 따지고 상벌 주는 염라대왕도 아니고 땅위의 판검사도 아니다. 지옥은 하나님이 만드신 형벌 장소가 아니다. , 불의, 미움, 탐욕, 거짓, 위선 등등 어둡고 부정적인 실재들이 진선미와 거룩자체 이신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의 빛 앞에서' 스스로 견디지 못하고 두더쥐와 시궁창의 쥐들이 어둡고 침침한 곳을 찾아 들듯이 모여드는 곳이 지옥이다.

 

'알곡과 가라지의 분별에 대한 교훈'의 진정한 목적은 악인에 대한 심판과 징벌 보다는, 험한 세상 속에서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선하고 정의롭고 아름다운 일을 하면서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긴자'를 하나님이 결코 모른척 하지않고 다 거두시겠다는 '격려의 약속' 인 것이다. 이것이 유치한 윤리 사상이라 한다면 이 세상은 늑대들의 천국이 될 것이다.

 

'알곡과 가라지 분별신념'에 대한 틸리히와 화이트헤드의 생각

 

'20세기의 사도'라고 일컫는 철학적 신학자 틸리히(P. Tillich,1866-1965)'20세기 최고의 지성인'이라고 일컫는 과정철학자 화이트헤드(A.N.Whitehead, 1861-1911)의 견해를 참고삼아 들어보기로 하자. 먼저 틸리히의 말을 들어보자.

 

"(새하늘과 새 땅, 종말이란) 실존 속에 혼합된 형태로 있었던 긍정적 요소들은 일시적인 것이 영원 것으로 고양된다는 것이다. 그 때, 긍정적 요소들과 혼합되어 있던 부정적 요소들은 모두 제거되고 배제된다. 그것이 모든 종교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최후심판, 악의 멸절, 알곡과 가라지의 분리등 비유가 말하는 상징 의미다. '심판'을 뜻하는 헬라어 '크리네인'(krinein)'분리시킨다'는 의미도 있다. 악으로부터 선을, 거짓으로부터 참을, 용납된 것을 거절된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는 행위이다"(조직신학, 3, 394-400쪽 참조)

 

화이트헤드는 버트란트 러셀 등과 더불어 영국에서 수학자, 과학자, 철학자로서 활동하다가 나이 60세에 이르러 미국 하버드대학 철학교수로 초빙받아 20세기 과정철학을 정립한 세계적 학자이다. 그의 세계관과 신관이 기독교의 그것과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는 신과 세계의 관계성을 논하는 주제에 대하여 다음같은 의미깊은 인상적 말을 하고 있다.

 

"신의 본성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이미지는, 그 어떤 것도 상실되지 않도록 하려는 애정어린 배려의 이미지이다.....신의 결과적 본성은 구원될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버리지 않는 사랑의 심판이다....신은 세계를 구제한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신은 진선미에 관한 자신의 비전에 의해 세계를 이끌어가면서 설득해가는, 애정어린 인내심을 갖고 있는 세계의 시인이다"(과정과 실재, 오영환역, 595쪽 참조)

 

20세기 대표적 지성인이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틸리히와 화이트헤드가 말하려는 본질적 핵심은 두 가지이다. 최후심판, 알곡과 가라지의 분리 등의 비유가 말하려는 진리는 무한 광대한 우주 속에서, 량적(量的)으로 보면 인간 역사나 개인의 삶은 그야말로 찰나적 순간이요, 오늘 돋았다가 사라지는 들풀 같은 존재이지만, 질적(質的)으로보면 지극히 작은일일지라도 버려지거나 잊혀지지 않고 거두어지고 영원에로 고양되면서 기억되고 남는다는 것이다.

 

이슬람 문화권에 가보면 유달리 양탄자를 짷는 가내공업이 발달하였다. 양탄자를 짷는 원재료는 양털이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답고 훌륭한 앙탄자 일지라도, 한가닥 한가닥 미미한 양털 없이는 만들어 지지 않는다. 비유하건데, 인간과 역사의 엎치락 뒤치락 싸움과 고난과 선악의 뒤엉킴도 양탄자 짷기 같은 것이라고 볼수 있다. 어떤 크기와 어떤 문양과 색상의 양탄자를 짷을 것인가는 베틀 앞에 앉아있는 여인의 마음속에 있다. 약하고 미미한 양모는 양탄자의 예술작품으로 변해가며 영원히 남는다. 예수님의 '추수 때 알곡과 가라지 분리의 비유'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엄정하고 진실한 생명의 가장 깊은 비밀을 알려주시는 하늘 말씀이 아닐까?